조선 백자 그리고 청화(靑畵)백자
조선왕조는 백자를 왕의 그릇으로 정했다.
조선왕실의 백자는 경기도 광주 관요 곧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백자 위에 왕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이 코발트(cobalt)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
백자 항아리 (조선 15~16세기)
백자 청화 매화 새 무늬 항아리 (조선 15~16세기)
청화 백자 왕실의 예(禮)와 권위
조선왕조는 유교의 이념을 따르는 나라로 예(禮)를 중요시하였다.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오례(五禮)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궁중 잔치 때 꽃이나 술을 담았던 청화백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왕실의 예(禮)를 대표하는 기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청화백자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청화백자는 중국 명대 청화백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오래지 않아 조선만의 특징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일본과도 교류하였다.
백자 청화 구름 용 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백자 청화 '홍치이년(弘治二年'명 소나무 대나무 무늬 항아리 (조선 1489년)
문인이 사랑한 청화백자
조선왕실은 문인(文人) 취향의 선도자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튿히 영조와 정조 임금 때에는 문인들이 그리고 감상했던 사군자와 산수, 인물,동물의 그림과 시(詩)를 청화백자에 장식하였다.
청화백자 문방구는 사랑방에 놓인 문인의 작은 세상을 보여준다.
문인 지식층이 즐겨 키우던 꽃들이 청화백자에 가득 나타나기도 한다.
백자 청화 꽃 무늬 표주박 모양 병 (조선 18세기)
백자 청화 괴석 꽃 무늬 사각합 (조선 19세기)
청화백자, 만민(萬民)의 그릇이 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실과 사대부, 문인 지식층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청화백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청화백자는 보다 다양하고 화려하게 변모하였다.
꿈과 바람이 온 세상을 뒤덮듯 십장생(十長生), 봉황, 호랑이, 박쥐와 복숭아 등을 청화뱍자에 담아
장수(長壽)와 복(福)을 기원했다.
왕조의 말기 광주 관요의 체재가 흔들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쓰러져 갈 때도
운현궁과 조선왕실에서 사용된 청화뱍자는 뛰어난 수준과 품격을 잃지 않았다.
백자 청화 모란 무늬 병(조선19세기)
백자 청화 '함풍년제(咸豊年製)'명 구름 용 산수 무늬 다각접시 (조선 1851년~18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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