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쉼터♡/경상도

호미곶

아라비카노 2009. 2. 24. 23:50

 

동외곶()·장기곶()이라고도 한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여 장기곶으로 불렸다.

 1918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표현인 갑()으로 고쳐 장기갑으로 불리다가 1995년 장기곶으로 변경하여 불렸다.

 2001년 12월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가 《동해산수비록()》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하였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내륙 쪽은 해발고도 200m의 산지지만,

 대보리(구만리() 사이에 어촌이 발달해 있고 약간의 농경지도 펼쳐진다.

해안에서 2km까지는 수심 약 40m 정도이며 대보리에는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호미곶 상생의 손(바다)

바다와 육지에 손이 하나씩 있는데 이를 '상생의 손'이라 부른다.

 

 

 

 호미곶 상생의 손(육지)

 

 호미곶 등대

 

 

 '연오랑 세오녀상'

 제8대 아달라왕(신라 제 8대 임금) 즉위 4년 정유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연오를 보고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이상히 여기고 가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음을 발견했다.

세오는 그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 바위는 전처럼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 왕에게 고했다. 마침내 그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연오는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괴변이 일어났다. 일관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하고 말했다.

 왕은 사자(어떤 사명을 맡아서 심부름하는 사람)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게 했다. 사자를 만난 연오는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이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가 짠 세초(細 -고운 비단)가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하고 비단을 사자에게 주었다. 사자는 돌아와 그대로 고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은 그 전과 같이 되었다.

 비단은 어고(御庫-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대궐 안의 곳간)에 간직해 두고 이를 국보로 삼았다.

이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연오는 대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세오도 쇠오, 즉 금오의 변녕으로 볼 수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영일현의 영일(迎日),

즉 '해맞이'의 지명도 태양 신화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일본서기>의 <천일 창설화>도 같은 유의 광명의 신, 즉 태양의 이동 신화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동남해안과 일본의 이즈모 지방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한 문화를 따라 이동한 태양 신화의 한 모습을 이 설화가 잘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를 상징하는 호랑이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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